김찬국의 생애와 사상

<학문 및 대학행정>
김찬국은 1927년 4월 23일 경북 영주에서 출생했다. 영주서부보통학교, 예천보통학교, 대구 계성중학교 입학, 서울 중앙중학교(고등과정) 졸업(1945). 1945년 11월 연희전문학교 신과 입학하고, 1950년 5월 10일 신학과 1회 졸업(졸업논문: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같은 해 6월 1일 연세대학교 대학원 신학과에 구약학 전공으로 입학. 6.25 전쟁 후 12월에 군입대. 1952년 4월 지동식 목사의 주례로 성윤순과 결혼. 부산 피난지의 연희대학원에서 수업 지속했고, 1953년 7월 피난지에서 학술지인 「신학논단」을 창간하는데 결정적 기여. 「신학논단」은 연세대학교 최초의 학술지. 종전 후 서울로 돌아와 “구약에 나타난 계약의 하나님의 구속적 의를 논함” 주제로 석사학위(1954년 2월). 백낙준 총장의 추천으로 1954년 미국 뉴욕의 유니온신학교에 1년 장학금 제약으로 신학석사(S.T.M.) 1년 과정 졸업. “the origin of chedeq (justice) in Isaiah 40-55”(1955). 1957년 학과장으로서 ‘연세신학공개강좌’를 시작.
1960년 4.19 혁명에 참여하여, 연세대 교수단 이름으로 부상자 및 사망자를 위한 모금운동을 주도. 62년부터 학생처장 수행(5.16 군사정변으로 대학이 어려웠던 시절). 1968년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했고, 1970년 9월부터 안식년을 허락받아 1년간 영국 스코틀랜드 St. Andrew University에 연구교수. 여기서 William McKane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제2이사야의 창조전승”을 논문 주제를 연구.
1954년부터 연세대 신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하여 신학과장, 동대학 연합신학대학원장, 신과대학장을 역임했으며, 1977년 3월 해직 후 1984년 8월 복직한 다음 1988-92년 연세대 부총장을 거쳐 정년퇴임으로 명예교수 추대. 1993년 8월부터 1998년 6월까지 강원도 원주 상지대학교 총장 역임.
<민주화 운동>
1971년 8월 귀국 후 국내 정세는 박정희 독재정권이 10월 위수령 발동으로 대학 문이 닫히는 고초를 겪음으로 암울해짐. 1년 뒤 10월 정권 연장을 위한 비상계엄령 선포로 다시 대학 문 닫음. 73년 말부터 독재정권에 맞서는 ‘개헌청원100만인서명운동’에 동참. 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배후 교수로 지목되어 5월 7일 강제연행, 구금, 구속. 육군보통군법회의에서 1심 징역 10년, 2심 징역 5년으로 감옥생활. 75년 2월 17일 형집행정지로 석방됐으나 문교부 압력으로 강제 교수해직(1차). 1977년 3월 성미카엘신학원(성공회), 협성신학교(감리교), 선교교육원(기장), 복음교단신학교 등에서 강의. 1980년 2월 국방부로부터 사면, 복권. 박사학위 취득과 함께 연세대 6년만에 복직. 전두환의 5.17 계엄선포와 함께 7월 30일 5개월만에 2차 해직. 1984년 4년 여만에 두번째 복직. 1987년 6월 10일에는 ‘고 박종철 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4.13호헌 철폐 국민대회’가 예정. 전날인 9일 이한열 학생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 한달 후인 7월 9일 “애국학생 고 이한열 열사 민주국민장”으로 장례에 호상으로 참여.
<상지대 민주 총장>
1993년 재단 비리의 전형으로 학내 갈등을 겪고 있는 상지대학교 학원민주화투쟁 교수협의회의 추천으로 민주 총장. 1994년 8월 30일 구재단으로 구성된 이사회에서 총장 해촉(세번째 해직). 이에 원주 기독교교회협의회, 참교육시민모임, 정치개혁시민연합 등 전국 18개 시민사회단체의 대표자들이 ‘상지대 사태대책연대회의’를 결성하여 투쟁에 합류. 11월 교육부 결정으로 복직. 상지대학교 민주화에 기여. 1998년 6년 총장직 수행 후 퇴임.
<민중인권실천운동>
교도소 성경 보급. 민주회복구속자협의회(민청학련 구속자 석방운동),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NCC 구속자 석방을 위한 목요기도회에 참석. 1976년 3·1절 명동성당 민주구국선언 구속자를 위한 금요기도회 참석. 1977년 12월 ‘민주교육선언’(성내운, 안병무, 한완상 등 12명의 해직교수들). 평화시장 대책위원장(1977년), 동일방직 사건 긴급대책위원회 부위원장(1978-79). 해직교사 후원과 전교조 결성에 참여. 1978년부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원으로 참여하였고, 1992년에는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인권운동에 적극 활동. 1989년 10월 설립된 사단법인 노동인권회관은 부천서 사건의 피해자인 권인숙, 조영해 인권변호사 등의 각계의 기금으로 설립 초대 이사장 활동.
KBS 이사(1988년-1991년), 1992년 9월 “MBC 정상화와 공정방송 실현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가 출범할 때 상임위원장직. 1990년부터 2년간 민주화와 해직교수들이 참여하는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회장. 1992년 10월 28일 동두천 미군 기지촌에서 26살의 윤금이 씨가 미군병사 케네스 리 마클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는데, 전국 48개 시민사회단체들이 참여한 “주한미군병사의 윤금이씨 살해사건 공동대책위원회”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민주화에 참여하여 고난받은 본인과 자녀들을 위한 “민주유공자장학재단”을 출범하는데 80여 명과 함께 기여. 1997년 4월 1일에는 ‘제주 4.3 제50주년기념사업추진범국민위원회’ 공동대표를 하여 제주도 양민학살 진상조사와 유족들의 명예회복을 추진.
<교회 활동>
서울 복음교회 다니던 중 부산 피난 시절에 감리교로 옮김. 1957년부터 경기도 과천 안골(우면동)에 있는 하리교회에서 전도사로 시작하여 6년간 목회. 영등포감리교회에서 설교 목사(63-65년)로 있으면서 영등포지역 노동자에 관심 갖고 교회에 산업전도위원회 구성. 후에 도시산업선교 현장 활동의 근거가 됨. 1977년 노량진중앙교회(현재 목양감리교회)에서 2년간 설교 목사. 창천감리교회에서 민족적 독립운동과 민주주의 운동의 차원으로 3.1절 기념예배 시작하였고, 한글독립선언문을 만들어 예배에 도입. 1982년 미국장로교회 총회본부의 초청 선교사로 약 1년 동안 미국을 방문. 미국서도 구속자 석방운동과 민주화운동 지속. 창천감리교회의 협동목사로 오랫동안 목회 활동.
[출처] https://blog.naver.com/chankook1927
약력
학력
영주서부보통학교 (전학)
예천보통학교 (졸업)
대구계성중학교 (전학)
서울중앙중학교(5년제) (졸업)
연희대학교 신학과
연희대학교 대학원 신학과 신학석사
미국 뉴욕 유니온 신학대학원 S.T.M. 신학석사
이스라엘 예루살렘 히브리유니온대학 학기성서고고학 과정 (1971. 여름)
경력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장
연세대학교 학생처장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장
연세대학교 부총장
상지대학교 총장
수상
국민훈장 모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