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식 선생은 대한민국 신학자이다. 한국에서 토착화(土着化) 신학의 논쟁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한 그는 한국 무교(巫敎)를 연구하고, 이를 신학적으로 해석했다. 고운 최치원은 우리나라에 유·불·선 삼교를 포함하고 사람들을 교화하는 현묘한 풍류도(風流道)가 있다고 했다. 풍류도는 한국무교가 신라의 화랑제도로 꽃 피운 우리 종교문화이고, 한 민족의 고유한 마음의 원형(얼)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유동식은 한국 문화신학으로서 풍류신학을 구상하고, 예술신학을 그 내용이자 방법이며 결론이라 했다. 그는 한국에서 예술신학이라는 미지의 분야를 개척한 최초의 신학자로, 그의 연구는 한국 신학의 남상(濫觴)으로 평가받는다.
선생은 백수(白壽)를 누린 평신도(平信徒) 예술(藝術) 신학자라 할 수 있다. 1922년 11월 22일에 황해도 평산군 남천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신학과 교수를 역임한 유동식은 학교 동문 근처 자택에서 말년을 보내다, 2022년 10월 18일에 소천했다. 생전 숫자 2와 인연이 깊다 말한 선생은 2022년에 생을 마쳤다. 그는 세는나이 101세로 백수(百壽)를 넘겼고, 만 나이 99세로 백수(白壽)였다. 이 또한 한국과 서양의 나이 사이에서 100세를 살았으니, 평소 숫자에 특별한 의미를 두었던 선생답다. 그의 삶은, 긴 시간만큼이나 역동의 근·현대 한국사를 그대로 품고 지나왔다. 그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6·25 전쟁과 피난, 한국의 경제적 성장과 정치적 민주화를 모두 겪었다. 말년에는 ‘강남스타일’로 대표되는 이른바 ‘한류’까지 목도하고, 한국 문화의 독창성을 풍류신학과 관련하여 논하기도 했다. 화랑의 풍류도에서 시작된 한국 문화의 가능성을, 기마민족(騎馬民族)의 기상으로 세계에 위상을 떨친 소위 ‘말춤’이 보여주었다고 그는 평가했다.
선생은 평생을 평신도 신학자로 살며, 자신만의 독특한 신학을 자유롭게 펼쳤다. 그는 평소 음주에 거리낌이 없어서 목사 안수를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도적 겉치레는 선생의 삶과 사상에 어울리지 않는다. 유동식은 1960년에 홍콩에서 열린 동아시아교회협의회의 평신도와 청년 지도자를 위한 강습회에 초청되어 참가했다. 이를 계기로 평신도 신학자로 알려지기 시작한 그는 1963년 가을부터 1964년 봄까지 스위스 보세이 에큐메니컬 연구소에서 공부하며, 타종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관심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는 한국 전통종교 연구로 이어졌고, 1972년에 일본 국학원대학에서 한국 무교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한국에 많은 신학자가 있지만, 한국 전통종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신학자는 그가 유일하다. 때때로 학문적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한국 신학계에서, 그는 평신도 신학자로서 우리의 기독교적 영성의 토대를 한국무교와 신라화랑의 풍류도에서 찾는, 파격적인 시도를 할 수 있었다.
선생의 예술활동은 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이다. 그는 성서학, 선교학, 한국신학사, 한국교회사, 조직신학 등 다양한 분과를 두루 연구했다. 이와 함께, 신학을 넘어 예술에 대한 선생의 학문적 관심과 성과는 그를 예술 신학자로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는 예술작품 속의 전경(前景)과 후경(後景)의 미학구조와 관계를 분석하고, 이를 기독교 계시와 연결하여 신학적으로 재해석한다. 선생은 풍류신학의 본론과 결론이 예술신학이라 말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그의 생업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유학과 출장길에 항상 그림도구를 챙겨 다니며,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겼다. 예술은 학문적 연구 대상이자 취미로서 그의 삶에 중요한 한 부분이었다. 소금은 자신이 펼친 사상 그대로, 한 멋진 삶을 살아낸 풍류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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