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연보
- 1875.3.26
-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능내동에서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 두 형이 이승만 출생 이전 사망, 6대 독자
- 1877
-
서울로 이사. 남대문 밖 염동, 낙동을 거쳐 도동 우수현(雩守峴)에서 성장
- 1895.4.2
-
신긍우(申肯雨)의 권유로 Henry Appenzeller가 설립한 배재학당에 입학
- 1897.1.1
- 양홍묵(梁弘黙) 등과 함께 순한글 주간신문 『협성회회보』를 창간, 주필로 활동. 한국 최초의 현대시“고목가(枯木歌)”를 이 회보에 게재하여 열강의 대한국 침략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움
- 4.9
- 『협성회회보』를 토대로 최초의 일간지인 『매일신문』창간, 주필로 활동
- 8.10
-
이종일(李鐘一)과 함께 『뎨국신문』을 창간, 주필로 활동
- 11.29
- 남궁억(南宮檍) 등과 함께 중추원 의관(종9품)으로 임명
- 1899. 1.9
- 박영효(朴泳孝) 일파의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투옥
- 1.30
-
주시경(周時經, 본명 周相鎬)이 건네준 총을 들고 최정식(崔廷植), 서상대(徐相大)와 함께 탈옥을 기도했으나 다시 체포되어 경무청으로 이송
- 7.11
- 옥중에서 상하이 주재 미국인 선교사 Young J. Allen과 청국인 채이강(蔡爾康)이 쓴 『중동전기본말』을 순한글로 편역(1917년에 하와이에서『쳥일전긔』로 출판)
- 1901.2~1904.7
-
옥중 생활 중에서도 『뎨국신문』과 『신학월보』에 수시로 논설을 기고
- 1902.10
- 옥중학교를 설립하여 어른 및 어린이 죄수들에게 성경과 찬송가를 가르치고, 한글, 한문, 영어 등을 교육
- 1903.1
-
옥중 도서실을 개설하여 운영
- 1904.6
-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영한사전 집필을 중단하고, 『독립졍신』 집필 (1910년 2월 로스엔젤레스에서 초판 출판, 1917년 호놀룰루에서 제2판 출판, 해방 이후 여러 차례 중복 출판)
- 8.9
- 형집행이 정지되어 출옥
- 10.15
-
출옥 후 남대문 인근 상동교회의 상동청년학원 교장직에 취임
- 11.4
-
대한독립 보전을 위한 미국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고종황제의 측근 민영환의 밀명을 받고 미국으로 출국. 일본 고베를 거쳐 호놀룰루에 도착, 윤병구와 합류
- 12.31
-
샌프란시스코, 로스엔젤레스, 시카고 등을 경유하여 워싱턴, D.C.에 도착
- 1905.2
- 조지워싱턴대학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
- 2.20
- Hugh A. Dinsmore 미국 하원의원의 주선으로 John M. Hay 국무장관과 30분간 면담
- 8.4
-
뉴욕 동쪽 Oyster Bay의 Sagamore Hill ‘여름 백악관(Summer White House)’에서 윤병구와 함께 Theodore Roosevelt, Jr. 미국 대통령을 면담. 러일전쟁 종전을 위한 포츠머스회담에서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의 비협조로 외교공문 발송 좌절
- 1907.6.5
- George Washington University 학부 졸업
- 6.9
- Harvard University 석사과정 입학
- 7.10~15
-
Colorado주 Denver에서 열린 애국동지대표자대회(The Korean Patriots’ Delegation Convention)에서 의장으로 선출
- 7.9
-
Princeton University 박사과정 입학
- 1910.7.18
-
Princeton University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음. 그의 학위논문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은 1912년 , Princeton University press에서 출간
- 10.10
- 귀국(Liverpool, London, Paris, Berlin, Moscow, Manchuria를 거쳐 서울역에 도착. 5년 11개월 6일 만의 귀국)
-
11.6~
1912.3 - YMCA 청년학교 학감에 취임하여 교육, 전도 활동. John Raleigh Mott의 Work for New Students를 번역해 출판. 37일(1911.5.16~6.21)간 전국순회전도 여행
- 5.1
-
미국 Minneapolis, Minnesota에서 개최된 Quadrennial General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 평신도 대표로 참석
- 6.19
- Princeton University 은사인 Thomas Woodrow Wilson(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을 Sea Girt, New Jersey의 summer home에서 만나 대한의 독립에 대한 지원을 호소. 윌슨의 추천서를 가지고 워싱턴 등지를 다니면서 대한의 독립을 호소
- 1913.1.28~2.3
-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하여 하와이 호놀룰루 도착
- 2.8
-
한인기숙학원(Korean Boarding School for Boys)교장직에 취임
- 4.
-
『한국교회핍박』 발간
- 9.20
-
월간『태평양잡지』 창간(나중에 『태평양주보』로 제호를 바꿈)
- 1914.7.29
- 한인여자(성경)학원(Korean Girls' Seminary 를 설립
- 1917
- 호놀룰루에서 『독립졍신』(제2판)과 『쳥일전긔』를 출판
- 10.29
-
뉴욕에서 개최된 25개 약소민족대표회의(League of Small and Subject Nationalities)에 코리아대표로 참석
- 1918.12.1
- 대한인국민회에서 정한경, 민찬호와 함께 Paris Peace Conference에 파견될 대표로 선출
- 1919.1.6
-
Paris Peace Conference에 참석하기 위해 호놀룰루에서 미국 본토로 출발
- 3.3
-
정한경의 제의에 따라 League of Nations이 일제 치하의 코리아를 해방시켜 위임통치한 후 독립하는 방안을 Wilson 대통령에게 청원
- 3.21
- 노령 임시정부에서 국무경(국무 및 외무총장)으로 추대
- 4.11
-
상해임시의정원이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대
- 4.14~16
-
서재필, 정한경과 함께 필라델피아 시내 ‘소극장’에서 대한인총대표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개최. Independence Hall까지 행진
- 4.23
- 13도 대표들이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열어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집정관총재로 추대
- 4.23
- 워싱턴, D.C에 대한공화국(The Republic of Korea) 활동본부 설치
- 6.14~27
-
‘대한공화국’ 대통령 이름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국가원수들과 Paris Peace Conference 의장 Georges Benjamin Clemenceau에게 한국의 독립선포를 알리는 공문 발송
- 7.4
-
국내외 동포에게 독립을 위한 헌신을 촉구하는‘대통령 선언서’ 발표
- 7.17
-
워싱턴 D.C.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 설치
- 8.25
-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The Korean Commission to America and Europe for the Republic of Korea)를 설치하고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임명
- 9.1
-
상해 프랑스조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대통령으로 선출
-
1919.10~
1920.6 -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대한독립 지지 요청 연설
- 1920.3
- Charles Spalding Thomas, John Shields 미국 상원의원들을 통해 코리아독립 승인안을 미국 의회에 상정하였으나 본회의에서 부결
- 11.15
-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부임하기 위해 호놀룰루 항에서 비서 임병직과 함께 화물선 편으로 상해 프랑스조계로 출항 (일본이 30만 달러의 체포 현상금을 걸었기 때문에 중국인 시체들을 본국으로 운송하던 화물선으로 밀항)
- 12.28
-
상해 프랑스조계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대통령 취임식 개최. 이후 5개월간 집무
- 1921.5.29
- “외교상 긴급과 재정상 절박”으로 인해 미국으로 떠난다는 대통령 교서를 발표하고 상해에서 출항
- 6.29
- 호놀룰루에 도착하여 대한인동지회 결성
- 8.10
-
워싱턴회의(태평양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호놀룰루에서 출항
- 8.27
-
워싱턴 D.C.에 도착하여 한국대표단(Korean Mission) 조직(대표장: 이승만, 대표: 서재필, 서기: 정한경, 고문: Fred A. Dolph).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9월 9일 한국대표단에게 워싱턴회의에 관한 전권 부여
- 10.1~12.1
-
워싱턴회의 미국대표단에 대한 독립을 호소하는 청원서 제출
- 1925.3.23~4.10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대통령 이승만 면직안을 의결하고,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공표
-
1929.10.5~
1930.1.8 - 미국 본토 전역을 순방하고 호놀룰루로 귀환
- 1931.11.21
-
만주사변 발발 후 만주국 문제가 외교적 쟁점으로 부상하자 하와이동포들로부터 외교자금을 조달하여 호놀룰루 출항
- 12.7
- 워싱턴 D.C. 도착 후 국제연맹외교를 위한 준비활동 시작
- 1932.11.10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국제연맹외교를 위한 특명전권수석대표로 임명
-
1932.12.23~
1933.1.4 -
뉴욕에서 출발하여 국제연맹 본부가 있던 제네바에 도착
(Liverpool, London, Paris, Lyon 경유)
- 2.8
-
코리아문제에 관한 문건을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회원국 대표들과 특파원들에게 배포
- 3
-
만주문제와 관련된 한인 문제를 다룬 The Koreans in Manchuria를 서영해 등의 도움을 받아 Paris의 고려통신사를 통해 출판
- 7.9~10
- 귀국(Liverpool, London, Paris, Berlin, Moscow, Manchuria를 거쳐 서울역에 도착. 5년 11개월 6일 만의 귀국)
- 8.10~16
- 프랑스 Nice를 출발하여 뉴욕에 도착
- 10.8
-
뉴욕시 Lexington가(街)의 호텔 Moncler에서 제네바에서 만났던 Francesca Donner와 결혼
- 1935.1.24
- 부인과 함께 호놀룰루 도착. 이후 교회 건립활동과 교육기관 설립활동에 매진
- 1939.3.30
- 중일전쟁 발발 이후 미일전쟁을 예견하고 워싱턴 D.C.로 출발
- 4.13
-
워싱턴 D.C.에 도착하여 구미위원부 재건을 위한 시찰 및 준비활동 수행 (8월 10일 호놀룰루로 잠시 귀환)
- 11.10
-
Francesca와 함께 워싱턴 D.C.로 거주지를 옮김
- 1941.4.20
-
호놀룰루에서 9개 단체가 모인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외교위원장으로 위촉
- 6.4
-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을 맡음
- 6
- 뉴욕에서 일본의 미국 침공을 경고하는 Japan Inside Out을 출간
- 12.9
-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시작하자 Japan Inside Out이 각광을 받음. 미국 국무부 정치고문 Stanley Hornbeck, 대통령 Franklin Delano Roosevelt, 국무장관 Cordell Hull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문과 임시정부 승인 요구 공한(公翰)을 전달.
- 1942.1.16
-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를 창설. 미국 상원 원목 Frederick Brown Harris, 전 캐나다 대사 James Cromwell, 언론인 Jay Jerome Williams, 변호사 John W. Staggers가 중심인물.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지원을 목표로 활동
- 2.27~3.1
-
워싱턴 D.C.의 Lafayette 호텔에서 대한인자유대회(The Korean Liberty Conference) 개최. 이승만이 이끄는 한미협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공동 주최
- 6~7
-
미국의 소리(VOA) 단파 방송을 통해 독립투쟁을 고무하는 한국어, 영어 연설
- 10.10
- 미 육군전략사무처(OSS) Millard Preston Goodfellow 대령에게 항일 게릴라 조직 제의
- 12.4
-
OSS에 통보한 50명의 한국인 중 12명이 선발되어 군사훈련 시작
- 12.7
-
Franklin Roosevelt 대통령에게 한국인 군사훈련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 발송
- 3.30
- 스팀슨 육군장관에게 하와이 한인동포들을 일본인과 같은 국민으로 대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냄. 육군장관으로부터 다르게 취급하겠다는 회신을 받음
- 5.15
- 미 대통령 Roosevelt에게 임정 즉각 승인과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 발송
- 8.23
-
제1차 퀘벡 회의에 참석한 Roosevelt 대통령과 Winston Churchill 영국 수상에게 전보로 임정 승인과 군사지원을 요청
- 8.
-
한미협회와는 별도로 기독교인친한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를 조직
- 9.11
-
제2차 퀘벡 회의에 참석한 Roosevelt와 Churchill에게 Cairo Declaration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일본 패망 후 한국의 즉각 독립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냄
- 1945.2.5
-
미 국무차관 Joseph Grew에게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는 소련의 야욕을 막는 방법으로 임정의 즉각 승인을 촉구하는 전보를 보냄
- 5.14
-
Yalta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이 한국을 소련의 지배로 넘겨주기로 비밀협약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발표함으로써(얄타밀약설) 미국 국무부와 충돌
- 8.15
- 해방. 즉각 귀국하려 했으나 이승만을 기피인물로 여기는 미국 국무부의 방해로 2개월간 지연
- 10.16
- 33년만의 귀국(김포 비행장). 조선호텔에 투숙. 다음날 귀국 담화 방송
- 10.21
-
허헌, 이강국 등 좌익 인사들이 이승만을 방문, 인민공화국 주석 취임을 요청
- 10.24
- 돈암장(敦岩莊)으로 이주
- 10.25
-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총재직을 맡음
- 10.31
-
돈암장에서 박헌영과 회담
- 1946.1.14
-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공산주의자들을 매국노로 규정하고 결별 선언
- 2.8
-
독립총성중앙협의회와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통합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총재가 됨
- 2.25
- 재남조선대한민국대표 민주의원 의장에 선출
- 6.3
- 전북 정읍에서 38선 이북처럼 38선 이남에서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정읍발언)
- 6.29
-
독립정부 수립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민족통일총본부(民族統一總本部) 결성
- 8.14
- 미국 Harry S. Truman 대통령에게 카이로 선언의 이행을 촉구하는 전문 발송
- 8.9
- 형집행이 정지되어 출옥
- 9.10
-
독립정부 수립 문제를 미소공동위원회로부터 국제연합에 넘길 것을 요구하기 위해 임영신을 미국에 파견
- 10.28
-
Cairo Declaration과 Potsdam Declaration에 위배되는 모스크바 3국 외무장관 합의 취소 요구 성명
- 12.2
-
독립정부 수립을 국제연합에 직접 호소하기 위해 도쿄를 거쳐 미국으로 출발
- 12.12
- 소련이 한국의 통일정부 수립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 확실하므로 38선 이남에서만이라도 과도정부 수립이 필요하다고 주장
- 1947.4.1
- 귀국하기 위해 워싱턴 D.C. 출발
- 4.13
-
도쿄를 거쳐 상해에 들러 장개석(蔣介石) 총통과 회견. 이청천 장군과 함께 귀국. 공항에서 김구, 김규식 등의 환영을 받음.
- 7.3
- 좌우합작을 주장하는 하지 중장과의 협조포기 선언. 가택연금
- 9.16
- 독립정부 수립을 위한 수단으로 38선 이남에서의 총선거를 주장
- 9.21
-
대동청년단 총재 취임. 단장은 이청천(李靑天) 장군
- 10.18
-
독지가들의 모금으로 마련된 이화동의 이화장(梨花莊)에 입주
- 11.14
-
국제연합 총회에서 국제연합 감시 하의 한반도 자유선거 실시 결정
- 1948.1.8
- 국제연합 코리아임시위원단 도착. 이승만은 환영군중대회에서 연설
- 5.10
- YMCA 청년학교 학감에 취임하여 교육, 전도 활동. John Raleigh Mott의 Work for New Students를 번역해 출판. 37일(1911.5.16~6.21)간 전국순회전도 여행
- 5.1
-
5.10총선에서 지역구인 동대문구에서 당선
- 5.31
- 제헌의회 의장으로 선출
- 6.16
- 헌법기초위원회에 참석하여 내각책임제 반대하고 대통령책임제 주장
- 7.20
-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당선(186명 출석 가운데 180표 획득)
- 8.11
-
제3차 국제연합 총회가 열리는 프랑스 파리에서 대한민국 승인운동을 펼칠 한국대표단 파견(장면, 장기영, 김활란)
- 7.24
-
대통령 및 부통령 취임식
- 8.15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 8.26
-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 체결
- 10.19
-
맥아더 주일본 연합군 최고사령관 초청으로 일본 방문
- 12.12
- 제3차 국제연합 총회(파리, 샤이요 궁Palais de Chaillot) 마지막 날 5.10총선의 결과 수립된 대한민국 독립정부 승인
- 1949.6.9
-
일본의 어업구역 확대에 반대 성명
- 8.8
-
장개석과 진해에서 회담
- 1950.2.14
- Douglas MacArthur의 초청으로 일본 방문. 재일동포 중소기업가에 대한 200만 달러 융자 약속
- 3.10
-
농지개혁법 개정법 공포. 봉건적인 지주-소작인 관계의 사회를 자작농-자유인의 사회로 바꾸는 혁명적 계기(4월 5일 농지분배 예정통지서 발송 시작)
- 6.25
-
6.25전쟁 발발. 조선인민군의 전면적 기습 공격
- 6.26
- MacArthur 장군과 전화 통화, 즉각 지원을 요청. 장면 주미대사를 통해 Harry S. Truman대통령에게 즉각 지원을 요청하도록 지시
- 6.27
- 기차를 타고 서울역을 출발. 대구에서 대전으로 이동
- 7.14
-
원활한 전쟁수행을 위해 맥아더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에게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위임
- 9.28
-
한국군에 38선 이북 진격을 명령
- 12.24
-
서울시민에 피난 명령
- 1951. 1. 4
- 1.4후퇴
- 7. 10
-
개성에서 정전협상 개시. 백선엽이 한국군 대표로 참석
- 9. 20
- 정전 수락 전제 조건으로 중공군 철수, 북한 무장해제, 국제연합 감시 하 총선거를 요구
- 11.19
- 자유당 창당과 총재직 수락
- 1952.1.18
-
연안수역 보호를 목적으로 ‘인접해양에 대한 주권에 관한 선언’ 발표. 이후 이승만이 ‘한일 양국의 평화와 질서를 위한 평화선’으로 부름에 따라 ‘이승만평화선(Rhee Line)’으로 불리게 됨
- 6.25
-
6.25전쟁 2주년기념식에서 유시태의 이승만 대통령 저격 미수. 배후인물 김시현 의원 체포
- 8.5
-
직선제를 통한 대통령 당선(부통령 이시영)
- 1953.6.18
- 부산, 가야 제9수용소, 광주, 논산, 마산, 영천, 부평, 대구 등지의 포로수용소에 수용 중인 2만 7천 명의 송환불원포로 석방
- 7.12
- 한미공동성명 발표. (1) 정전협정 체결 이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2) 미국의 장기 경제원조 보장 및 한국군 병력 증강 등에 합의.
- 8.8
-
경무대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변영태와 John Foster Dulles가 서명).
- 8.15
-
서울로 재환도
- 11.27
-
대만을 방문하여 蔣介石 Chiang Kai-shek 총통과 반공통일전선 결성 발표
- 1954.7.25
- 미국을 국빈 방문
- 7.28
- 미국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연설, 33차례의 열렬한 박수를 받음
- 7.31
-
Dwight D. Eisenhower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 후 정전협정은 사문화(死文化)되었다고 선언
- 8.3
- 국제연합 총회에서 한국 통일에 대한 지원을 역설
- 1955.6.7
- 기술자 해외파견안 재가
- 1956.5.22
-
이승만(자유당)의 대통령 당선 공고. 부통령은 장면(민주당)
- 8.15
-
제3대 대통령에 취임
- 9.22
-
대통령령으로 10월 1일을 국군의 날로 공포
- 1957.3.21
- 82회 탄신기념일을 맞아 우남장학회 발족
- 12.3
- 한글전용을 국무회의에서 지시
- 1958.1.1
-
이북동포에게 메시지 전달
- 3.8
- 북한에 납치된 KAL 민간여객기 기체 송환 요구
- 4.26
-
Ali Adnan Ertekin Menderes 터키 수상에 대한민국 1등 건국공로훈장 수여
- 10.28
-
원자력 연구 지시
- 11.5
- 자유베트남 吳廷琰 Ngô Ðình Diệm 대통령의 초청으로 베트남 방문
- 1959.1.1
-
이북동포들을 방송을 통해 위로
- 6.8
-
제5차 아시아민족반공대회 대표들을 환영하는 시민대회에 반공 메시지 전달
- 1960.1.28
- 대한민국 독립 이후 최초로 사법부 방문
- 3.15
- 선거에서 대통령 4선 확정
- 3.28
-
선거부정에 대한 논란이 커지자 자유당 간부들을 불러 민심수습 5개 항목을 지시
- 4.19
-
경무대 앞에 도달한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들이 발생.
- 4.23
-
시위진압 경찰의 발포에 따른 시민들의 사망에 대해 애도의 뜻을 발표
- 4.24
-
유혈사태에 책임을 지고 자유당 총재 사임
- 4.26
-
국민이 원한다면 ① 대통령직 사임, ② 정·부통령선거 재실시, ③ 이기붕의 공직 사퇴, ④ 내각책임제 개헌 등을 약속. 시위대 대표 5명과 면담 후 하야를 약속
- 4.27
-
대통령직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
- 4.28
- 이화장으로 하야
- 5.29
- 하와이로 출국
- 1965.7.19
-
호놀룰루 Maunalani 요양원에서 서거,
- 7.27
- 가족장으로 정동감리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